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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환경

국제정치와 개성공단

남북한 정치쇼와 개성공단

 

 

 

남한과 중국의 무역이 활발해질수록 북한과 중국의 정치는 멀어졌다. 그렇다고 남한과 북한의 정치가 가까워진 것도 아니다. 단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면서 긴장완화의 명분이 필요했고, 그렇게 개성공단은 생겼다. 양 측은 개성공단을 만들기는 하였지만, 언제든지 폐쇄하여도 영향을 받지 않을 정도의 규모만 유지하였다. 더 키울 생각은 정치인들에게는 없었다. 늘 위태위태하다가 결국은 순식간에 폐쇄되고, 남북한의 교역은 그렇게 끝장났다. 개성공단은 1945년 남북한이 분단된 이래로 유일한 경제 교류 창구였다. 그마저도 늘 불안정한 남북관계의 흔들림을 받다가 20162월 폐쇄되었다. 북한의 핵무기와 미사일 발사 실험이 그 직접적 원인이었다. 북한이 개성공단에서 나오는 이익금으로 핵개발에 사용되어 이를 차단한다는 명분이었다.

 

개성공단의 부침

개성공단은 경기도 개성시 봉돌리 일대 93000면적에 조성된 공업단지이다. 20006·15공동선언을 계기로 남북경제협력사업 일환으로 추진되었다. 2000822일 남쪽의 현대아산()과 북쪽의 조선민족경제협력연합회(민경련)와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아태)가 체결한 개성공업지구건설운영에 관한 합의서가 공단 조성의 단초가 되었다. 그 이후 북측이 20021127일 개성공업지구법을 공포함으로써 구체화되었다. 200211월 북측이 개성공업지구법을 제정 공포한 이후 12월 남측의 한국토지공사, 현대아산과 북측의 아태. 민경련간 개발업자지정합의서를 체결하였다. 20036월 개성공단 착공식을 가졌고, 200412월 시범단지 분양기업에서 생산한 제품이 처음으로 반출되었다.

 

개성공단은 남북협력과 남북경협의 대표적인 사례였고, 그렇기 때문에 남북관계 변화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20103월 천안함 침몰 사건과 관련하여 2010524일 남한의 정부는 개성공단에 대한 신규투자 금지와, 공단 체류 인원을 평소의 50 ~ 60 % 수준으로 축소하는 조치를 취했다. 20101123일 북한이 남한의 연평도지역에 포격을 한 후로 남한 정부는 이에 대한 대응으로 1124일부터 개성공단으로 출정을 잠정 차단하였다가, 최소한의 출정을 허용하기 시작했다. 개성공단은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 집권 이후인 2013, 166일동안 가동이 전면 중단됐었다. 지금과 다른 것은 당시엔 북한이 개성공단 폐쇄조치를 내린 것이다. 20132월 북한 3차 핵실험 이후 한·미 연합 군사훈련이 이뤄지자 이에 반발해 개성공단에 통행 제한 조치를 내렸다. 그리고 2016210일 남한 정부는 핵무기와 미사일을 동원한 무력도발이 심화됨에 따라 더 이상 좌시하지 않겠다는 내용과 함께 개성공단을 전면 중단하였다. 폐쇄 직전까지 개성공단에는 남한 124개 기업이 북한 주민 54763명을 고용하여 운영되고 있었다.

 

 

 

개성공단과 국제무역

일반적으로 국가 간의 물류의 흐름은 무역이라 부르지만, 남북한의 물류 흐름은 교역이라 부른다. 다른 나라들은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만, 남한은 북한을 국가가 아닌 미수복 지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개성공단에서 만들어 진 것을 한국산 (Made in Korea)’로 인정받는 것은 나라마다 달랐다. 엄연히 다른 체제와 독자적인 외교 관계를 가진 북한에서 제조된 제품을 한국산으로 수출할 수 있는 지에 대한 여부는 수입국의 정책에 따라 달랐다. 폐쇄경제를 유지하는 북한과 달리 한국은 많은 국가들과 FTA를 체결하여 무관세로 수출을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개성공단을 한국의 영토로 인정하고, 여기서 제조된 제품이 한국산으로 인정되면, 전 세계 수출시장에서 상당한 가격우위를 달성할 수 있다. 한미 FTA, EU FTA는 개성공단 제품을 대한민국산 인정하지 않지만, 한인도 CEPA, 한싱가폴 FTA, -EFTA, ASEAN FTA에서는 대한민국산으로 인정하고 있다. 외교정책적으로는 체제와 이념을 달리하는 분단국가의 한 축(북한)이 다른 축(남한)을 매개로 글로벌 가치사슬에 편입되는 개성공단의 국제화를 통해 북한이 자연스레 시장경제와 국제무역규범을 학습하는 세계적으로 전례가 없는 사례이다. 남북정상회담 당시 김정일은 김대중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개성을 내주겠다"고 하였다. 이 때 김정일이 개성 토지 임대권을 50년간 주는 것으로 체결하지 않고, 개성의 영토주권을 50년을 시효로 대한민국에 증여하였다면 이런 애매한 원산지 문제는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한겨레 신문(2017.6.16.)에 의하면 한국이 현재 외국과 맺은 14건의 FTA에서 개성공단 조항은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첫째는 위의 역외가공방식으로, 싱가포르, EFTA, ASEAN, 인도, 페루, 콜롬비아, 베트남, 중국과의 FTA에서 이를 채택했다. 이들 FTA에서 개성산 제품이 한국산 원산품이 되는 요건은 역외(개성) 부가가치 40% 이하이며, 역내(한국)산 재료비는 45%(-싱가포르 FTA)~60% 이상(-싱가포르 FTA 7)이다. 둘째는 한-싱가포르 FTA에서만 유일하게 역외가공방식과 함께 도입한 통합인정(ISI)방식이다. 이는 당사국이 합의한 일정 품목은 역내산으로 인정하는 가장 느슨하고 활용도가 높은 방식이다. 셋째는 미국, EU,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터키와의 FTA에서 발효 후 역외가공지역위원회를 구성해 구체적 요건을 논의하기로 한 위원회 방식이다. 어떠한 방식이든 개성공단 제품이 FTA혜택을 받고 수출한 물량이 얼마만큼인지 구체적인 통계는 나와있지 않으나, 비중이 그리 커 보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에서 이러한 조항을 넣으려고 하는 것은 개성공단의 역외가공지역(OPZ) 인정에 따른 수출증대보다 개성공단의 국제적 지위 획득과 개성산의 수입품의 대체 효과에 더 주안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

 

 

국제 정치와 개성공단

민족은 정치적이지 않을 지 몰라도, 남북관계는 정치이다. 정치 때문에 갈라진 것이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남북관계를 정치적으로 풀려고 하고 있다. 그리고 정치는 언제나 그렇듯이 문제를 해석하고, 풀어가는 관점이 다른 여러 그룹들이 다툼을 하는 당파적이다. 이전의 여러 권력들이 그랬듯이 어떤한 정부도 당파적인 정치의 관점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정치인들에게 남북관계란 수많은 정치적 변수중의 하나에 불과할 뿐이다. 4년마다 돌아오는 선거에서 중요한 쟁점이기는 하지만, 절대적 변수는 아니다. 그래서 한국의 정치는 늘 변한다. 김대중정부, 노무현정부, 이명박정부와 박근혜 정부를 거쳐 이제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다. 그리고 그 때마다 늘 남북관계는 달라졌다. 반면에 북한은 남북관계가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 통치의 문제이다. 김일성, 김정일에 이어 김정은까지 3대째 일가족에 의한 일관된 공산주의를 유지하고 있다. 남한이 중국과 수교를 하고 무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자 북한의 김일성은 중국에 대한 배신감을 느끼고, 중국과는 별도의 독자적인 체제 안정화 대책을 만들려고 했다. 그리고 수많은 착오와 3대에 걸친 시도 끝에 핵을 가졌다. 북한이 핵실험을 할 때마다 매번 개성공단은 위기를 맞았다. 20132월 북한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실험으로 인해 한반도의 긴장은 한껏 고조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북한은 끝내 개성공단 가동 중단을 선언했고, 4개월이 지난 후에야 재가동에 합의했다. 남북한 관계는 늘 도발과 합의, 그리고 곧 합의의 붕괴를 반복했다. 1992년 이후 북핵협상의 경과를 보면, 도발-위기-일괄타결-합의 붕괴로 이르는 패턴이 드러난다. 개성공단 문제도 북한 핵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미사일 발사 실험과 핵실험을 통해 북한은 도발과 위기국면을 조성했다. 그러면 이 위기를 매개로 국제사회가 북한과 대화를 하면서 합의를 통한 일괄타결을 이뤄낸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합의가 붕괴되고, 그로 인해 다시금 도발과 위기 단계로 접어드는 악순환이 그동안 계속되어왔던 것이다. 핵실험이야말로 북한이 꺼내들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카드였기 때문에, 북한은 그 이후 어떤 식으로든 대화를 통한 합의 국면에 들어가야 했다. 그런 반복 속에 북한은 체제 수호를 위해 핵무기가 필요했고, 남한은 안정적 경제 발전을 위해 평화가 필요했다. 이제 양 측은 원하는 것을 가졌다. 그리고 몇 년만에 남북한 회담이 다시 열린다. 북한이 이전보다 한결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대화를 받아들였다. 지금부터의 남북한 대화의 주제는 서로 가진 것을 서로를 위하여 쓴다는 전제가 되어야 협력이 가능할 것이다.

 

 

 

http://www.joseilbo.com/news/htmls/2018/01/2018011034347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