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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환경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전 지구적 개혁은 지속된다, 쭈욱~

영웅이 시대를 만드는가? 시대가 영웅을 만드는가?
시대는 영웅을 필요로 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영웅은 늘 시대를 필요로 한다고 본다. 때로는 영웅은 본의 아니게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세상을 바꾸어 놓는다. 1990년대 초 세상을 뒤흔들어 놓은, 아니 아예 세상을 바꾸어 놓은 소련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를 다시 생각한다. 그리고 그로 인하여 환호했던 서방 자본주의 사람들과 그로 인하여 여지껏 고통받는 러시아 사람들의 삶이 교차된다. 그의 이상은 높았지만, 현실은 너무 낮았다. 그런 상황은 개혁과 이상을 꿈꾸는 사람에게는 항상 같다. 한국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이제 한국도 이상과 현실을 적당히 맞추어가는 리더가 필요하다. 고르바초프처럼 실패하지 않으려면.



1.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1985년 3월 11일 체르넨코의 사망이 알려진 지 5시간 만에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서기장 취임이 발표됐다. 당시 54세로 젊은 세대에 속했던 그는 더 이상 지도부의 약화를 방치할 수 없었던 정치국 노인들의 합의에 따라 전격적으로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서기장이 된 고르바초프는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면서 조심스럽게 개혁노선을 밝히기 시작했다. 심각하게 침체된 국가경제를 살리는 것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그는 계획과 관리를 포함한 경제기구 전반에 걸쳐 철저한 개편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르바초프의 정책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
사회. 경제 발전을 촉진시키기 위한 구조적 개조를 의미한다. 부패한 관료제 타파, 공산주의 경제의 체제적 한계점을 개선하고 점진적인 시장자유화를 추구하는 정책을 추진한다. 보통   '개혁'으로 번역된다.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가 대내 개혁정책의 핵심을 이루는 정책으로 공식화된 시기는 고르바초프의 당서기장 취임 후 1985년 4월 개최된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회에서였다. 소련도 스탈린식의 소련 경제모델 형성하고, 흐루시초프와 브레즈네프식의 개혁은 있어왔다. 그렇지만 이전의 개혁이 공산주의의 체제내에서 기득권을 유지하는 개혁이었다면, 고르바초프는 신진 개혁세력을 키우며 소련을 개혁하는 방식을 취했다는 점이 다르다.

글라스노스트(Glasnost)
정보의 자유와 공개를 의미한다. 당시 소련에 만연해 있던, 언론 검열 및 어용화, 사상 탄압 등 경찰국가주의에 대한 변혁을 의미한다. 흔히 '개방'으로 번역된다.
과거 공산주의 국가의 경제를 말할 때 흔하는 게 하는 농담이 있었다. ‘노동자는 일하는 척하고, 국가는 봉급을 주는 척한다’고 했다. 공산국가에서는 모든 사람들의 봉급이 거의 같으므로 근로자들이 열심히 창의적으로 일할 동기부여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소득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공산당 간부가 더 많이 받는다. 월급이 내가 얼마나 창의적이고 열심히 일하는 지와 관계가 없으니 생산성이 향상될 리가 없다. 페레스트로이카는 이러한 스탈린식의 소련 사회주의가 만들어낸 생산적 노동, 창의성, 진취적 태도를 자극할 경제적, 조직적 여건의 결여를 제거하려고 하였다. 그럼으로써 서투른 작업과 타성, 무책임한 물질적 보상, 공무원의 터무니없는 권위의식과 노동자의 노동 의욕 상실을 없애려는 노력이었다. 페레스트로이카의 기본은 기존의 공산사회의 생산과정 간의 관계가 매우 복잡하게 얽혀있어, 이를 자본주의와 같이 재조정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인식하는데 있다.
그는 우선 소련사회에 깊게 퍼져있는 부패와 부조리, 비능률을 없애기 위해 시장 경제 및 자본주의 요소를 적극 도입했다. 공산사회에서 금지되었던 개인기업 설립과 운영을 허락하고, 기계. 설비 등의 생산 수단의 개인 소유를 보장하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했다. 또한, 기술의 현대화를 추구했으며 노동 생산성의 증대와 부패한 관료 기구의 혁신에도 힘을 기울였다. 관료 기구를 축소하고 기업체에 좀더 많은 자주권을 확대하는 것뿐만 아니라 집단 농장 제도의 개편도 아울러 실시했다. 그러나 단순한 개혁만으로는 그 성과를 거둘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고르바초프는 1987~1988년 비능률적인 관료와 당 체제를 개선해야 한다고 자각했다. 그 결과 페레스트로이카와 함께 개방ㆍ개혁 정책인 글라스노스트 정책을 전개했다. 왜냐하면 페레스트로이카(개혁)는 글라스노스트(개방적 토론)를 전제로 하였기 때문이다. 글라스노스트는 정책 결정과 집행과정의 공개와 이에 대한 대중의 참여를 요청하였다. 공개성에 입각한 정치적 개혁은 사회 집단간 관계의 재정립을 필요로 하였다. 1988년 12월에는 헌법 개정을 통해 양원제 의회인 인민 대표 대회를 창설하고, 복수 후보제와 직접 선거의 원칙에 따라 인민 대표 회의 선거를 실시했다. 선출된 인민 대표 회의는 헌법에 보장된 공산당의 일당 독재를 폐지함으로써 복수 정당제의 법제화를 준비했다. 이와 함께 표현의 자유와 알 권리가 크게 확대되었다. 학술, 언론, 예술 활동의 자유를 확대하는 등 정치적 민주주의를 펴나갔다.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는 사회 경제 발전을 촉진시키기 위해 시도돼야 하지만, 글라스노스트(glasnost)를 통한 정치 분야의 민주화 없이는 달성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글라스노스트는 ‘개방’ ‘공개’를 의미한다. 고르바초프의 이러한 개혁정책은 정책집행의 확실성과 함께 개혁세력을 창출하려는 정치적 계산도 깔려 있었다.
구소련은 1930년대의 체제구축기를 지나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초강대국으로 성장하면서 1950∼60년대 최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그 이후 1970년대 중반 이후 쇠퇴기를 거치면서 1980년대 고르바쵸프의 페레스트로이카로 마지막 부흥을 시도하나 실패하면서 소련은 해체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2. 서방 세계의 평가
"소련의 개혁은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아니라 유리 안드로포프가 시작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적다. 안드로포프가 소비에트연방(소련)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국가원수)일 때 3명을 불렀다. 블라디미르 돌기흐와 니콜라이 리즈코프, 그리고 미하일 고르바초프(중앙당 정치국원)였다. 그러고는 '지금 나라가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 한번 보라. 모든 방면에서 단호한 개혁(페레스트로이카)이 필요한 시점이다. 지혜를 모아 국가 개혁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1990년 당시 러시아 인민대표대회 대의원으로, 보수강경 공산당원이었던 세르게이 바부린 '러시아 범국민동맹' 총재의 회고다. 바부린은 안드로포프가 구체적으로 언제 페레스트로이카를 지시했는지 적시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1985년 이전이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연합뉴스, 2015.6.12.)
위의 기사처럼 페레스트로이카는 소련 내부에 오랫동안 깊숙이 자리잡은 병폐들이 썩고 썩어서 나오는 고름처럼 이미 분위기는 숙성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패하였다. KIEP 박제훈의 연구에 의하면 소련 시대의 개혁을 바라보는 입장은 크게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개혁무용론이다. 이것은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틀을 유지하는 한 체제 내의 어떠한 개혁도 생산성과 효율 향상을 달성할 수 없다는 논리이다. 일찍이 사회주의 경제 계산논쟁에서 서방학자들이 주장하였듯이 시장이 기능하지 않는 경제에서 효율성의 확보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논리와 맥을 같이 한다. 서방의 전통적인 시각이기도하다. 반면 어느 정도의 질과 규모가 확보된 적절한 개혁은 체제의 비효율성을 상당 부분 감소시킬 수 있다는 입장이 있다. 소련의 경우는 어느 경우에 비추어 보아도 성공하기 어려운 부분적이고 불충분한 개혁이 추진되었으며 주지하는 바와 같이 실패했으며 종국에는 체제의 붕괴를 가져왔다. 박제훈, 러시아의 체제전환과 자본주의의 발전에 관한 연구 (2000.12, KIEP)

실패의 원인은 다양하다. 어쩌면 너무 갑작스럽게 해서 무너졌거나, 아니면 너무 부드럽게 해서 무너졌거나. 고르바초프가 사회적 합의를 이루지 못한 채 개혁을 하려고 했기 때문에 지지자가 없었다는 말도 있다. 그의 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의회와 정부 간뿐만 아니라 대통령과 개혁팀, 중앙과 지방, 정부와 국민 사이에도 어떠한 합의나 지지가 형성되지 못했다. 페레스트로이카는 오랜 소련 경제의 침체에서 나오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나왔다. 1861년 농노해방이나 1905~1917년 혁명은 수년에 걸친 서방 및 슬라브 우호주의자들의 토론 끝에 다가왔다. 그리고 토론에 참가한 사람들은 모두 누가 무엇을 위해 서 있는지 모두가 알고 있었다. 볼셰비키들은 스탈린이 어떤 장애에도 굽히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제헌의회 개최 책임을 맡겼다. 하지만 페레스트로이카는 달랐다. 토론이 시작되지도, 시작할 만한 구체적인 개념도, 이를 이해한 사람도 많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됐다. 왜냐하면 러시아 역사 이전에 어떠한 역사적 선례도 없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후 산업사회로의 이행은 어느 곳에서도 일어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개혁을 위한 토론이 결핍됐던 이유의 하나는 일관성 있는 정당이 없었기 때문이다. 페레스트로이카와 옐친 집권시기에는 광범위한 증오와 공산당의 복권에 대한 두려움이 팽배했다. 개혁은 민초들의 지지가 없이 높은 곳에서 포고령으로 내려왔고 그 결과 지속성이 없었다. 러시아의 민주주의는 제도적으로도 미약했지만 시민사회가 뒷받침되지 못하였다. 국영 기업 관리자들과 같은, 특히 구 체제에 기반을 갖고 개혁으로 인해 불이익을 당할 몇몇 이익집단들이 구시절의 관료들과 연계하여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러시아의 민주주의와 경제 모두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1917년 볼세비키 혁명이후 80여년간 억압 속에 있었던 소련은 이러한 갑작스러운 개방에 적응하지 못했다. 정치적 민주화는 당의 비판을 가능하게 만들었고 그동안 무결점으로 여겨지던 당과 소련은 그렇게 무너졌다.


3. 고르바초프에 대한 평가
미하일 고르바초프 옛 소련 대통령은 냉전 체제 종식과 동서 화해의 상징적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냉전을 종식시켰다는 평가를 받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의 조국인 러시아에서는 소련 붕괴로 인해 러시아에서 사회적으로 혼란해지고 세계적 위상이 추락하면서 ‘조국을 팔아버린 지도자'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그는 보리스 옐친 행정부의 급속한 개혁을 반대해 1996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도 하였으나 낮은 지지율로 낙선하였다. 고르바초프가 일생 동안 겪은 위상 변화를 그의 이름이 점점 짧아지는 것으로 표현한 농담도 있다. 
집권 초기(1985년)엔 "고르바초프!"
집권 중기(1988년)엔 "고르비!"
하지만 최후(1991년)엔 "고!"(GO! 꺼져!)
역사에서 그의 개인적인 평가도 많은 논란이 있지만, 역사의 흐름에서 개인의 역할이 어느 정도 미칠 수 있는 지에 대한 토론에서도 자주 들어지는 사례에 속한다. 1991년 고르바초프가 소련 대통령에서 사임한 이후 러시아에 기대했던 허다한 희망이 무너졌다. 그런데 소련의 붕괴가 과연 고르바초프의 개인적 실패로 평가될 수 있을지, 아니면 소련 자체의 문제로 누가 소련의 지도자가 되었든 붕괴했을 지에 대한 논란도 있다. 그렇지만 어떤 경우든 세계사적 변화의 흐름을 고르바초프라는 인물이 속도를 높였다는 데는 모두들 공감하고 있다.
고르바초프는 그의 새 책을 발표하는 행사에 참석한 몇몇 시민이 그에게 “페레스트로이카(개혁) 정책을 시작한 것에 죄책감이 있느냐”고 물었고 이에 그는 “페레스트로이카가 불러온 긍정적 사실·부정적 사실 모두 있다. 하지만 페레스트로이카는 러시아와 러시아 국민에게 자극을 주었고 그것은 전 세계에 ‘시동을 거는’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1985년부터 1990년까지 제8대 소련 공산당 서기장, 1990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 대통령을 맡은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미·소 냉전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국제 질서를 연 주역으로 평가된다. 독일 통일을 이끌어 내고 냉전 체제를 해체한 공로로 지난 1990년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주도해서 추진한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은 실패했고 그 여파로 소련 해체와 본인의 실각이라는 정치적 불운을 겪기도 했다. 이에 따라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역사의 진보와 자신의 권력을 맞바꿨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문화일보, 2017. 10. 11)

4. 국제 무역 질서의 개편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는 말 그대로 지구의 절반을 한 순간에 날려버렸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첨예하게 대립하였던 지구, 그래서 ‘양극화’라는 말이 있었다. 공산중의와 자본주의는 단순히 물건을 생산하고 분배하는 경제와 정치 체제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인간을 보는 관점이 달랐고, 세상을 보는 눈이 달랐다. 물질적 세계뿐만 아니라 정신세계마저 나뉘어져 있었다. 그 중 절반의 정신과 물질세계의 존재 이유가 부정되었다. 그리고 세계는 ‘자본주의’라는 하나의 이념으로 통일되었다.
그러면서 서로를 위협하는 존재가 아닌 투자하고 투자를 받아야할 상대로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냉전의 시대는 페레스트로이카로 끝나고, 서로의 경제적 이익을 위하여 적극 협력하는 세계 시장이 형성되었다. 냉전은 미국과 소련이 상대방과의 항구적인 공존이 결코 가능하지 않다고 인식함에 따라 시작되었다. 냉전시대에는 미국으로 대표되는 자유민주주의 진영과 소련으로 대표되는 공산독재주의로 나뉘어 모든 물자의 교류가 제한되었다. 그런데 소련에서 일어난 정체성의 변화와 이에 따른 대내외적 정책실험으로 냉전 자체가 무너졌다. 이후 대부분의 공산권 국가들은 자본주의 체제로 들어왔고, 중국도 점진적 독재체제로 시장경제 체제를 도입하였다. 바야흐로 명실상부한 세계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북한만 빼고. 중국과 소련의 자유시장제도 도입, 그리고 대한민국과의 국교 수립은 북한에 커다란 배신감을 느끼게 하였다. 그리고 그 반동으로 북한은 ‘우리식 사회주의’ 건설노력을 강화하였다. 소련과 동구권에서 공산주의 몰락은 공산주의체제의 모순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소련과 중국과는 독자적 사상체계인 “김일성의 ‘주체사상’이 옳았다는 것을 입증해주는 사건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세계로부터의 자신의 안보를 위한 핵무기를 개발하기 시작하고, 결국 성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