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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과 문화

이수만과 그의 시대

1. 한류韓流에서 K-팝까지, 기원과 출발

 

2014년 현재 한류韓流라는 단어는 ‘한국 대중문화가 국경을 넘어 순환되고 소비되는 현상’을 뜻한다. 초창기에는 폭이 다소 좁아 ‘한국 TV 드라마 열기’의 용례로 시작되었으며 이것이 대중음악, 영화 등으 로 확산된 것이 지금의 상황이다. 그러나 한류라는 용어의 기원을 찾아 올라가보면 그 의미는 지금과 조 금 다르다. 1990년대 한국의 문화관광부에서는 한국대중음악을 홍보하기 위해 기획, 제작한 샘플러 시디 에 ‘한류’라는 단어를 밖아 넣었다. ‘팝’이라고 하는 단어의 중국어 번역어가 ‘유행’이었으니 한류의 원래 의미는 ‘한국유행가歌’의 줄임말이었던 것이다. 발명發名은 한국에서 했지만 이를 유통시킨 것은 중국 미디어였다. 중국 미디어를 통해 ‘한류’는 이후 ‘한국 팝 음악’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통용되었다. 다소 모호하게 시작된 한류가 중국에서 본격적으로 폭발한 것은 1999년 11월의 클론 공연과 2000년에 들어 연달아 개최된 H.O.T와 베이비복스의 베이징 공연이었다. 클론의 공연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50주년 기념행사의 일부였고 중국정부가 공식적으로 공연할 권리를 허락한 한국 팝 뮤지션이라는 의미를 갖는 다. H.O.T는 베이징에서 1만 2천 명의 관객을 모았다. 그런데 왜 하필 중국에서 한류가 폭발한 것일까. 중국은 그때까지 자본주의적 문화 산업이 거의 발전하지 못한 ‘문화 개도국’이었고 당연히 상업적인 목 적으로 만들어진 ‘상품으로서의 음악’과 ‘상품으로서의 가수’를 처음 접했던 것이다. 이는 문화산업이 나 름대로 그 기반을 가지고 있는 일본, 홍콩, 싱가포르 등에서 한국 음악이 그다지 주목을 끌지 못했던 사 실을 상기하면 쉽게 이해가 된다. 한류가 처음부터 국내 업체의 진출로 시작된 것은 아니다.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입까지 한류 는 에이전시를 통해 소개되었다. 이 에이전시는 일종의 ‘문화 오퍼상’으로 한국 업체와 계약을 맺고 한국 의 문화 상품을 작은 규모로 판매했다. 이때의 대표적인 중국 에이전시로는 ‘우전宇田 소프트’가 있으며 이들은 1998년 H.O.T의 중국판 음반을 시디로 배급했다. 반면 K-팝이라는 신新한류 혹은 한류 2.0을 뜻하는 용어는 1998년 일본에서 H.O.T의 음반이 발매되고 1개월 만에 5만 장을 판매한 무렵부터 사용 된 것으로 추정된다. 제이팝J-pop과 달리 K-팝은 우리가 붙인 이름이 아니다. 일본 음악 산업계에서 한 국의 대중음악 전체가 아닌 해외로 수출되는 일부 한국 음악을 지칭한 것이 K-팝이다. 국제적으로만 통 용되던 이 단어는 2005년에 들어와서 국내용 단어로 전환된다. 2009년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유인 촌은 한국형 빌보드 차트를 만들겠다고 발표하면서 K-팝이라는 용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한다. 수십 년간 사용되어 온 유행가, 가요라는 명칭 대신 산업으로서의 한국 대중음악이 새로 이름을 얻는 순간이었다. 2011년 8월 미국의 빌보드는 ‘코리아 K-pop 핫 100’차트를 신설한다.

 

 

5. K-팝 그리고 이수만 시대의 명암

 

명실상부하게 ‘아시아의 스타’ 지위를 획득한 보아와 비와 세븐은 한국의 빅 3인 SM, JYP, YG 소속 으로 2000년대 중반 한국 대중음악을 대외적으로 대표하는 가수다. 이들 빅 3는 해외 진출에서 예전처 럼 대행업체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지사를 설립하여 직접 현지를 공략하는 ‘트랜스내셔널’한 기업이라 는 특징을 공유한다. 이 변화는 불과 10년 사이에 일어난 것으로 한국은 경제의 압축 성장에 이어 음악 산업에서도 압축 성장을 기록한 특별한 나라가 되었다. 경제성장의 문화적 버전이 지난 10년 간 한국 음 악 산업이었다는 얘기다. 이러한 압축적 ‘글로벌화’는 인터넷이라는 인프라(혹은 우리 삶의 기본 플랫폼) 를 통해 달성될 수 있었는데 62만 명이 구독하는 YG엔터테인먼트의 유튜브 채널은 이에 대한 반증으로 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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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영 스타일로 빅 3를 비교하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두견새를 통한 유명한 비유인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3인에 대한 설명은 빅 3의 수장인 이수만, 박진영, 양현석에게도 유용해 보인다. 오다 노부나가는 울지 않는 두견새를 죽여 버린다고 했다. 이수만 스타일이다. 시키는 대 로, 제시하는 대로 따라오도록 한다. 다른 방식으로 음악을 주장하면 잘라버린다. 심지어 그는 계약이 만 료된 가수들과 가깝게 지내지도 않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두견새가 울도록 구슬려야 한다고 했다. 박진영 스타일이다. JYP 소속 가수들이 떠나면서 하는 말이 있다. “나만의 음악을 하고 싶어서.” 비가 그랬고 G.O.D의 김태우가 그랬다. 박진영은 소속 가수들의 스타일을 인정하지 않는다. JYP에는 오직 JYP 스타일만이 있을 뿐이다. 그는 자신의 방향으로 따라오도록 구슬린다(표현은 이렇지만 실제로는 폭 력적일 수밖에 없겠다. 그런 의미에서 이수만과 박진영은 같은 맥락 위에 있다). 도쿠가와 이에야쓰는 두 견새가 울 때까지 기다린다고 했다. 양현석 스타일이다. 그는 인재를 발굴하지만 소속 가수들이 끼와 개 성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이른바 ‘똘끼’ 충만한 음악 스타일을 존중하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표현하는데 완숙해질 수 있도록 지켜봐 준다는 뜻이다. 빅 3가 내세운 자신들의 음악 영토에 대한 명칭을 보면 이 차이가 명확해진다. SM는 ‘타운’이고 JYP는 ‘네이션’이고 YG는 ‘패밀리’다. 그들의 경영 스타일과 그 명칭과 거의 일치한다. 그러나 빅 3를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것은 합리적인 발상이 아 니다. 이수만은 1세대로 봐야 하고 나머지 둘은 이수만을 보면서 배운 2세대로 보는 것이 맞다. 이수만 이 없었다면 나머지 둘도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은 위험하지만 일부 타당하다. 선발주자가 없었다면 둘은 같은 실수를 반복했을 것이다.

 

(출처 : 이수만과 그의 시대, 자유경제연구원, 남정욱)

http://www.cfe.org/20141120_134773